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읽고,

달의 조각

daisy loves her 2017. 12. 3. 21:46



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길고 근사하게 할 수 있다는 것

많이 부럽다




1

너무 쉽게 영원을 말하는 당신 역시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쯤은 애초에 알고 있었다. 그럼에도 싱거운 고백에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흘렸던 건, 세상 가장 유약하고 불안정한 감정에 기대를 거는 당신의 순수함이 예뻐서. 그 무모한 눈빛이 울컥할 만큼 맑아서.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알면서도 속기로 한다. 또 한 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로 한다.



2

어쩌면 당신은 영원히 자라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, 나를 보살피는 사이 어른이 되고 말았습니다. 물려받은 계절은 여전히 찬란해서 거울을 볼 때면 가끔 슬펐습니다. 이만큼 나는 자라서, 이제 어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. 미성숙과 성숙의 경계에서 당신의 청춘을 떠올려 봅니다. 세상에는 지금의 청춘만큼 한때 청춘이라 불렸던 시절들도 많겠지요. 당신의 청춘을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끔 서럽습니다. 나에게는 당신에게서 빼앗은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.



3

지는 달의 끝에 너를 걸어 놓고 나는 이 밤이 영원하기를 빌었어.

너는 세상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했어. 손에 넣고 싶은 것들은 모두 달을 닮았다고 했었지. 나는 지는 달의 끝에 너를 걸어 놓고서라도 이 밤이 영원하기를 빌었어. 기어코 너를 밀어내고 떠오른 태양이 야속해 힘껏 노려봤더니 눈이 아렸어. 맺히는 눈물조차 영원하지 않더라. 이 세계에 영원이란 없더라.



4

어쩌면 사람들은 모두 반짝 빛났던 순간의 기억으로 평생을 사는 게 아닐까. 언젠가 더 이상 어둠을 밝힐 수 없는 날이 오면 그 기억들을 녹여 만든 초를 태우겠지. 그러니 가장 반짝이는 기억을 만들자. 훗날 어둠을 밝혀 줄 초가 너무 쉽게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. 그렇게 충분히 빛나는 오늘을 살자. 먼 미래가 정말 내 몫이 되 거라는 보장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. 내일을 위해 깜깜한 터널 속에 가둬 두기엔 우리의 오늘이 너무도 찬란해. 기억해, 순간에 충실한 삶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걸. 미래란 어느 날 갑자기 밀려오는 파도가 아니라 지금 내 어깨를 적시고 있는 가랑비가 모여 만드는 물줄기일 뿐이라는 걸.



5

너와 함께 강가를 걸었어. 네 눈을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걸었지. 이따금 조약돌을 주웠어. 그렇지 않으면 덥석 네 손을 잡아 버릴 것 같아서. 잠시 쉬었다 가자 말하는 너의 곁에 앉아 돌을 골랐어. 가장 반질반질 윤기가 나는 녀석을 고운 손바닥 위에 올려 주었지. 그런 날이 있었어. 새하얀 돌멩이 하나가 마치 보석이라도 되는 듯 나는 밀려드는 감동에 벅차고, 너는 설레는 마음에 귀 끝을 붉게 물들이던 날이.

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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